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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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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1. 20 / 토라사와 렌

 

어쩌면 당신이 시간이 걸려 겨우 그 문턱을 넘었을 때, 당신을 맞이하는 것은 텅빈 집과 약간의 매캐한 카레 냄새일 것이다. 깔끔하게 청소된 집은 서늘하고, 말끔한 식탁 위에 익숙한 키링이 달린 열쇠와 함께 편지라고 부르기도 힘들 정도로 짧은 종이 쪽지 하나가 놓여 있다. 

 

친애하는 렌 군에게

당근하고 양파는 냉장실 두번째 선반 오른쪽에 손질하고 남은 걸 반쪽 넣어뒀어.
냉동실에 냉동 닭가슴살이 세 개 남아있어. 먹을 때는 전자레인지에 해동한 후에 2분 데우면 돼. 계란은 30일까지는 다 먹어야하고, 레토르트 밥은 현관 옆 선반에 한 박스 있어.
큰 냄비에 남은 재료들 다 넣어서 카레 만들어뒀으니까 밥 챙겨먹어. 사흘은 먹을 수 있을 듯?

그동안 고마웠어. 너무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크리스마스에는 그럼 잘 지내.

 

별다른 말 없이 이별을 고하는 짧은 문장에 주위를 둘러보면, 함께 살았던 동거인의 흔적은 아무데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앨범을 두고 고심하느라 거실의 CD 플레이어 주변에 쌓여있던 CD케이스 더미도, 작업실의 선반에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화장실에 꽂혀있던 칫솔도 당신의 것 하나 뿐이고, 동거인이 버릇처럼 세면대 위에 올려놓던 비누도 비누받이 위에 깔끔하게 놓여있다. 

 

로맨스 소설 더미를 보관하던 책장은 먼지 하나 없이 텅 비었고, 항상 소파에 걸쳐놓았던 동거인의 겉옷도 흔적 하나 없다. 항상 밤마다 펼쳐놓고 자던 이불도 깔끔하게 접혀져 벽장에 꺼낸 적도 없었던 것처럼 놓여있다. 남은 것은 냉장고 속에 있는 아직 온기가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카레 뿐이다.

 

혹은, 언젠가 응원이라고 이름붙였던 키링 정도.

그 외에는 당신이 동거인과 만나기 전에 살던 집과 그 무엇도 다를 게 없을 것이다.

 

어떤 관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한다.

언젠가 마지막으로 남겨둔 편지도 어딘가에 떨어뜨려 잃어버릴 것이고, 카레도 시간이 지나면 먹거나 버려야할 것이다.

그렇게 끝이 난다.

 


 

2011. 11. 21 / 토라사와 렌

 

마지막 트랙이 끝났다. 하바타케 마키오는 네임펜으로 대충 휘갈긴 글씨만이 적힌 백색 CD를 천천히 플레이어에서 꺼내, 집어들었다.

 

부숴버릴까?

 

조금 힘을 주기만 하면 뚝 부러질 것이다. 쓰레기 봉투에 넣어 밖에 내어놓으면, 하루만에 흔적도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겠지. 천천히 힘을 준다. CD가 부러질 듯 휘어진다.

 

문득 CD 위에 물방울이 툭, 떨어진다. 루미나리 컴퓨터의 번쩍번쩍한 새 건물에 비가 샐 리도 없고, 창밖을 보아도 메마른 밤하늘이 펼쳐져있을 뿐이다. 그러니 뜨끈하게 손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은 다름아닌 눈물이다.

 

나한테 왜 이러는거야. 내가 그렇게 잘못했어? 

 

손에서 힘이 빠진다. CD를 조심스럽게 내려놓는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할지. 너는 왜 그런 반응이었던 건지. 그리고 나는 왜 이렇게나…

 

이렇게나 괴로운지.

 

하바타케 마키오는 선의를 선의로 보답받은 적이 없다. 그의 선의는 언제나 악의와 비난으로 돌아왔다. 아무도 그의 선의를 원치 않는다. 아무도 그의 선의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무도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연한 명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국에는 미움받게 되어있다. 그게 세상이 그에게 선사한 운명이다. 하지도 않은 일로 비난받고 억울함을 느낄 새도 없이 지옥에 밀어넣어지고, 칼이 가슴에 박힌다.

 

나는 네가 행복하기만 하면 됐다. 너는 상냥해서 나를 친구로 삼아줬지만, 결국 네가 나를 싫어하게 될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어차피 그런 결말이라면 이기적이지만, 조금만 싫어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네 앞에서 사라져야지. 네가 괴롭지 않도록, 네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보이지 않는 곳으로 떠나야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름 없는 앨범은 누가 들어도 알 수 있을 만큼의 애정을 담고 있어서. 이름 없는 앨범에 딱 하나 붙은 이름이 내 이름이라서. 

그래서 너무 괴롭다. 죽고싶을 만큼 괴롭다. 머릿속에서 날뛰는 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크리스마스에는 네가 좋은 꿈만 꿨으면 좋겠어. 달지 않은 케이크를 준비해서 떠들썩한 하루를 보내고, 좋은 기억을 만들어주고 싶었어. 매번 생일 선물도 챙겨주고 싶었어. 돈을 좀 더 벌어서, 키링보다 좋은 걸 선물해주고 싶었어. 드럼을 배워서 같이 밴드를 하고, 네가 다시 음악을 즐길 수 있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내가 없으면 자주 청소하지 않을테니까 로봇청소기라도 장만하는 게 좋을 것 같았어. 내가 없어도 밥을 챙겨먹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카레를 만들어두고 떠났어.”

 

그냥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내가 너를 불행하게 했어? 왜 그런 표정이었어. 왜 그렇게 상처받은 표정이었어…

 

괴물이 된 것 같아? 네가 형을 죽인 것 같아? 모르겠어. 미안해. 나는 이미 일어난 일에, 운명에 저항하는 법은 몰라. 네가 그냥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는데, 방법을 몰라서 미안해. 내가 언젠가 한 말이 다시 상처가 되었다면 미안해.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지만 원하지 않으면 딱히 바라는 것도 없어. 그냥 들어줘.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어서 전화했어…

 

하바타케 마키오는 울먹이면서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말한다. 울음이 섞인 목소리는 잘 안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냥 그렇게 하는 게 최대한 생각해낸 결과였으니까, 그냥 그렇게 토해낼 수 밖에 없었으니까.

 

누군가의 애정을 느낀 것이 처음인, 배신당하기만 했던 하바타케 마키오는 인간관계에 서툴러서, 이런 것밖에 할 수 없었다.

 


 

2011. 11. 22 / 키타가와 린

 

너의 말에 문득 머리가 멍해진다.

그런가. 나 네게는 처음은 몰라도, 끝까지 진심을 말한 적은 없던가.

온통 숨기고 꽁꽁 싸맨 속내라서, 언제나 솔직한 너를 기만하고 있었던가.

 

그야 상처받지 않기 위한 자기방어지. 어쩔 수 없었어. 여린 속살을 보일 바에는 가시덤불이라도 두르고 있는 게 나아.

 

머릿속에서 뱀이 속삭인다. 숨겨. 숨기고 가리고 남들이 모르게 해. 모든 것이 약점이야. 모든 것이 날카로운 칼이 되어 돌아올걸. 결국 타인은, 믿을 수 없어.

 

하지만…

 

하지만 이렇게나 뛰어와주었는데? 나를 계속 친구로 두고 싶다는데? 내가 진심을 말해주길 바라는데? 그렇게나 속고, 찔리고, 상처받고, 기만당했는데도?

 

사실 진심으로 네게 있어서 나는 없는 편이 없다고 생각했어. 폭력적이고, 피를 좋아하는 괴물. 숨기는 것도 많고 비밀도 많지. 떳떳하게 살아오지도 않았고, 체질적으로 불운해. 지금까지 너를 많이 다치게 했어. 앞으로도 그러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없어. 계속 그랬듯이, 나는 분명 통제하지 못할테니까.

 

그런데…

 

그런데 너는 정말로 상냥해. 그 상냥함이 너무 달콤해서 배신당한다 해도, 언젠가 네가 나를 싫어하게 된다고 해도, 그래도 지금은 이대로 있고 싶어. 함께 있고 싶어. 떠나고 싶지 않아. 언젠가 배신당해도 괜찮을 것 같아. 나는 그런 거, 익숙하니까.

 

그렇지만 진심도 말해본 사람이 잘 말할 수 있어서, 입이 도저히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한 마디만을 입밖으로 낸다.

 

“...영화 보러 갈래?”

 


 

2011. 11. 23 / 하나부사 쥰

 

먼저 그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당신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 아니, 처음부터 오해가 아니라 그저 내 잘못일지도 모른다. 이케부쿠로에서 만든 친구들. 언젠가 당신에게 말한 친구 다섯 명 만들기 도전. 전부 위험해보이지 않는 사람으로 골랐다. 사람을 선과 악으로 나눈다면 선에 가까울 사람들. 낯선 사람에게도 쉽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 처음 만난 사람을 진심으로 쉽게 친구로 칭하는 사람, 그리고… 당신처럼 약간의 비일상에도 겁을 먹는 소시민. 

 

처음부터 골라 만든 친구였으니, 언젠가 진심을 다 보이지도 않고 마음대로 끝내버릴 생각은 당연하게 존재했을지도 모른다.

 

그냥 외로워서,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어서, 그렇지만 사람을 믿을 수는 없어서. 그래서 만든 적당히 숨기고 가린 사실을 털어놓을 만한 사람들. 그런 걸 ‘친구’로 칭했다.

 

그러니까 며칠 전 당신의 출근길, 겁을 먹은 표정의 당신을 억지로 끌어내서 고한 작별인사에서는 전혀 용기를 내지 못했던 것이다.

 

스스로부터가 거짓으로 대하고 있었는데, 상대가 진심일 거라고는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는가.

 

사람을 믿지 못한다. 사람을 좋아해서 내민 선의는 언제나 배신당하고, 끝내 비난과 혐오로 돌아왔으므로. 그러나 그 이야기는 이기적인 감정적 넋두리일 뿐이니, 지금은 하지 않기로 하자.

 

하고 싶은 이야기는, 삼 년 전부터 같은 몸에서 공생하고 있는 어떤 뱀에 대한 것.

 

“저, 불운 체질이라고 말했잖아요. 그만큼 많은 일이 있어서, 하지도 않은 일로 비난받고 누명을 쓰는 일이 잦아서요. 전에 말했듯이, 고등학생 때의 따돌림 건이나, 동생이 죽은 사건 같은 거요. 괴로웠어요. 배신감이 이루 말할 수 없어서, 오히려 정의에 집착했어요. 세상이 보는 나는 가해자에 살인자니까, 정의라도 추구하지 않으면 살아있을 자신이 없었어요. 그리고 그럴 때마다 머릿속에서 뱀이 속삭였어요. ‘찔러, 찔러. 찌르면 편해질거야.’”

 

“과장님이 쿠츠나기라고 알고 있는 건 그냥 ‘악의’ 그 자체에요. 인간의 피에 집착하고 칼에 깃들어 인간에게 기생하는 악의. 삼년 전에 쿠츠나기였던 동생에게 찔려서 숙주가 되었어요. 그 뒤로 계속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들렸어요. 칼을 휘둘러서, 너를 그렇게 보는 세상을 파괴하라고. 그래도 제게 남은 건 정의밖에 없었으니까, 칼로 다른 사람을 상처입히는 건 정의가 아니라 불의니까. 그래서 얼마간은 견뎌냈어요. 그런데…”

 

“그런데, 교도소에 있을 때의 동기들이 너무 혐오스러운 사람이었어요. 사람을 스스로를 위해 잔인하게 죽여놓고도 후회하지 않는, 그야말로 그린듯한 악인. 그리고 이번에는 뱀이…… 아니, 제가 생각했어요. 차라리 찔러서 쿠츠나기로 조종한다면, 이 악인들은 교화될 수 있지 않을까. 피해자의 유가족들에게 가서 사죄를 하고, 비난받고, 속죄를 하고, 다른 선한 일을 한다면 좀 더 나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

 

“그래서 찔렀어요. 그 뒤로 교도소에서 나와서, 출소일까지 한번도 연락 없다가 제 명의로 사채를 쓰고도 돈을 내놓으라고 찾아온 부모도 찔렀고, 사회에서 고립된 젊은이를 가스라이팅해서 착취하려던 사장도 찔렀고, 이후에는 예전에 있었던 학교폭력 건의 가해자들도 찾아가서 찔렀어요. 그게 잘못된 일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멈출 수가 없었어요. 불의에는 때로는 불의로 상대해야한다고 생각하게 되어서. 그리고 이케부쿠로에서 보이는 족족, 웬만해서 악인이라고 생각되는 사람은 찔렀어요.”

 

“그리고 며칠 전에, 그 날 밤에는… 살인을 목격했을 때, 머릿속에서 뱀이 날뛰고 있었어요. 얼른 찌르라고, 찔러서, ‘교화’시키라고. 상대가 쿠츠나기의 머리인 걸 아는데도. 머리는 찔러도 지배할 수 없다는 걸 아는데도. 그냥, 어느 순간부터 그만둘 수 없게 된 거에요. 너무 달린 탓에 브레이크가 녹슬어버린 거죠…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어요. 나는 괴물이 되었구나. 그렇게 생각했더니, 합리화했더니, 모든 게 편해졌어요. 나는 애초에 괴물이고, 사람을 찌르는 걸 좋아하니까, 피를 좋아하니까. 정말이지 홀가분해서, 후련해서, 기분이 너무 좋았어요. 그리고 같은 머리들도 나타났으니까, 나같은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이렇게 살아도 되지 않을까, 하고. 그래서 쿠츠나기를 완전히 받아들였어요. 같이 살아가자고 생각했어요. 그냥…”

 

그냥, 그렇게 된 이야기에요. …오해는 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이대로 과장님이 저를 싫어하고 멀리하게 된다고 해도 괜찮아요. 언젠가 걱정해준 사람이 있었다는 것만으로 괜찮으니까. 이케부쿠로를 떠나지 않기로는 했지만,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이해하려고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정말 긴 이야기였네요. 들어주어서 고마워요. 

 

정말로 괜찮았다. 진심으로.

당신이 이제 나를 비난한다고 해도, 나는 언젠가 정말 친구였던 당신을 떠올리며 살아갈 수 있을테니까.

 


 

2011. 11. 25

 

여유가 생겼다. 

 

하바타케 마키오는 전화번호부를 살펴보다가, 가장 처음 등록되었던, 이케부쿠로에 막 왔을 무렵, 그때는 하나밖에 없던 연락처에서 문득 시선을 멈춘다. 연락처의 이름은 ‘친구’. 가타부타할 것 없이 그저 그 단어만으로 정의된 관계다.

 

그때의 ‘친구’란 건 지금과 같은 의미가 아니었다. 그래서 하바타케 마키오는 생각한다. 이제 해묵은 인연은 정리할 때가 되었으려나, 하고. 

 

고등학생 때, 반 전체에게 따돌림 당하는 아이를 도와준 적이 있다. 상당히 오만하고 시혜적인 태도였을지도 모른다. 정의의 사도를 동경한답시고, 불의를 참고 싶지 않아서, 그 아이와 친구가 되어 적극적으로 가해자들에게 맞섰다.

 

결과는, 잘 알다시피 비극이다. 경찰에 학교 폭력을 신고하고, 그 후에 가해자들에게 협박당한 피해자에 의해 누명을 뒤집어썼다. 가해자들의 부모가 그 애의 집안을 흔들 수 있을 정도의 권력자라서, 아마 피해자로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일련의 살인 사건으로 인해 수감되었다가 교도소에서 나온 후에, 우연히 피해자였던 그 애와 만나게 되었다.

 

그 애는 제법 잘나가는 배우가 되어있었다. 돈도 많이 벌고, 친구들도 많이 생겨서, 즐겁게 웃으며 지내고 있던 그 애.

 

그 모습을 보니 억울해서, 화가 나서, 악의에 차서. 나는 너를 도와줬는데, 너는 나를 나락에 빠뜨리고도 즐겁게 웃고 있어서. 그래서 돈을 요구했다. 부모에게 떠넘겨진 빚을 청산하는데 필요한 돈을 요구했다. 속죄해. 나한테 진 빚을 갚아. 내가 너를 위해 해준 것에 대한 대가를 치러, 라고 강요하며.

 

여전히 심약한 부분이 있는 그 애는 별말없이 돈을 내어주었다. 그때는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너도 불의를 저질렀으니, 속죄해야하지 않겠어?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 관계를 ‘친구’라고 납작하게 적어두었다. 그리고 매달 들어오는 돈을 더해서 빚을 갚았다. 불의에는 불의로 상대해야할 때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나 또한 가해자라는 사실을 무시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 애와의 악연을 정리할 때가 되었다. 옛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 연결음이 몇 번 울리고, 곧바로 들리는 그 애의 목소리.

 

“마사토, 나야, 마키오. 그동안 미안했어. 용서해달라고는 말하지 않아. 다만 더 이상 돈을 보내지 않아도 되고, 날 신고해도 돼. 네가 바라는 처벌을 받을테니까. 괴롭혀서 미안했어. 나나, 그 때의 가해자들이나 똑같은 놈들이지. …갑자기 왜냐고? 내 사정 같은 거 알아도 그다지… …만나자고?”

 

차가운 공기 사이로 뿌연 입김이 흐려지는 계절이다. 칼처럼 날카로운 바람이 인연을 끊어내기 쉬운 계절이다. 그렇지만 이윽고 봄이 온다면…

 


 

사이타마에서

 

전철을 타고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아 도착한 곳은 낯설지 않은 동네다. 전철역에서 나와 비탈길을 올라가면, 머지 않은 곳에 타이시 고등학교가 보인다. 한때 매일같이 올랐던 언덕. 어렸을 때는 자전거에서 굴러떨어져 다리에 깁스를 한 채로 이 언덕을 오른 적도 있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어렸을 때는 그 이후에 경찰이 되는 것을 꿈꿨다. 전부 이 동네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이 거치는 코스를 따라 살아갈 줄 알았던 때도 있었다.

 

좋지 않은 기억으로 작별을 고하지도 못하고 도망쳤던 고향마을에 돌아오게 될 줄이야.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인생은 생각대로 굴러가지 않는 법이다.

 

함께 온 하야시 군은 ‘집’으로 돌아갔다. 아직은 아버지라는 이유로 쫓아내지도 못하는 불한당이 그 집에 있을테지만, 하야시 군은 어머니가 걱정되는지 빨리 집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몇 가지 ‘준비물’을 하야시 군에게서 받은 후, 그 불한당이 낮 시간을 보낸다는 도박장으로 향할 때 쯤이었다…

 

“......설마, 하바타케 군?”

 

누군가가 이름을 불러서, 뒤를 돌아봤다. 방금 전 스쳐지나간 사람이었다. 정장을 입은 숏컷의 여성. 머릿속에서 눈앞의 이와는 많이 다른 스타일의, 그러나 비슷한 이목구비의 사람이 떠오른다. 고등학교 때의…

 

“......반장?”

 

설마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이곳을 떠난 것도 거의 십 년이 되지 않았던가. 하지만 평범하게 타이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면, 자신 또한 이곳에 살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상대방은 많이 놀란 얼굴이었다. 그리고는 스쳐지나가는 죄책감. 그 감정에 문득 깨닫는다. 눈앞의 이 사람도 고등학교 2학년, 그 사건 때 방관자였다는 것을. 당연히 이제 와서 그런 사실이 억울하다던가, 속상하지는 않다. 그 당시 가해자들은 학급에 신분제가 있다면 최상위계층이나 마찬가지였다. 반항한 자신이 결국 어떻게 되었던가. 그러니 방관자라도 이해할 뿐이다. 하지만 상대는 그 사실이 떠올라 불편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냥 한 번 웃어주고는, 그대로 발걸음을 돌려 떠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반장이 가까이 다가왔다.

 

“저기, 잘 지냈어?”

 

잘 지냈냐고. 그 말에 많은 일들이 떠오른다. 괴로웠던가. 혹은 억울했던가. 이 동네를 떠나고,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바보같은 짓도 많이 저질렀고, 세상을 원망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떠났고, 혼자 살아가기로 결심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하지만, 요 근래에는 꽤나 즐거웠다. 많은 사람들이 떠나가도, 그대로 있어주는 사람들도 생겼고, 즐거운 추억도 생기고, 취미도 새로 만들고…

 

그래서, 그냥 그렇게 말했다.

 

“잘 지냈어.”

 

반장은 그 말에 묘한 표정을 짓는다. 안심하는 기색인지, 혹은 걱정하는 기색인지. 하지만 그 감정에 반응해줄만한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그냥 가만히 상대가 이만 용건을 마치고 보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반장은 곧이어 망설임도 없이 말한다.

 

“미안해, 하바타케 군. 그때 말이야. 고등학교 2학년 때. 마사토 군이 괴롭힘 당할 때, 하바타케 군이 나서서 막았다가 되려 괴롭힘당했을 때 도와주지 못한 거. 정말 미안해. 반장으로서 나섰어야 했는데. 아니, 사람 된 도리로 나섰어야 했는데 말이야. 줄곧 생각했어. 후회하고, 사과하고 싶었어. 하바타케 군한테도, 마사토 군한테도.”

 

미안함이 가득 담긴 사과가 줄줄 흘러나온다. 상세하기까지한 참회는 오히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만든다. 그냥 조금 얼이 빠져서 듣고만 있다가, 상대의 말을 막는다.

 

“잠깐, 됐어. 이해해. 반장이 괴롭힘에 가담한 것도 아니고. 어차피 그 녀석들한테 반항했다가는 나처럼 됐을지도 몰라. 반장은 그때 성적도 우수했고, 입시를 준비하고 있었잖아. 괜히 불이익이라도 당했으면…”

 

“아니.”

 

곧바로 가로막힌다. 반장은 냉철한 얼굴로 숨도 쉬지 않고 이어서 말을 내뱉는다.

 

“불이익을 당했더라도 그랬어야 했어. 막았어야 했어. 그때는 하바타케 군 한 사람만이 나섰지만, 나도 나섰더라면, 그리고 다른 아이들도 나섰더라면. 그랬다면 정말 무언가 변했을지도 모르잖아.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마사토 군에게도 그렇게 끔찍한 기억이 생기지는 않았을거야.”

 

그러니까 미안해. 나서지 않아서. 그때 정말 정의의 히어로였어, 하바타케 군은. 

 

반장은 준비라도 해온 것처럼 확고하게 사과를 계속한다. 용서는 바라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그냥 그때의 기억에 대한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것처럼. 

 

문득 깨닫는다. 반장은 어른이 되었구나. 내가 정체되어 있는 동안, 계속해서 생각한 끝에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고, 심사숙고하여 행동할 수 있게 된 거야. 왠지 묘한 질투심이 솟아났다. 그래서인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칼없이 살아가겠다는 다짐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돌려보니 외면해왔던 모순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어서. 이미 찔러버린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하냐는 모순이.

 

반장은 그것도 모르고 계속해서 말을 잇는다.

 

“나, 지금 로펌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거든. 괜찮다면 그때의 사건, 다시 재판에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 여태까지 그러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하직 신입 변호사지만, 선배들이 든든한 편이라…”

 

그러면서 건네주는 명함 한 장. 이제는 웃지도 못하는 이상한 표정이 되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 그런 걸 다시 재판에 올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가정법원에서 판결이 이뤄진 소년범죄고, 마사토 군은 과거를 꺼내기도 싫을텐데.

 

지나치게 이상적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째서인지 명함을 받아서 주머니에 고이 넣어두었다. 이윽고 반장은 약속이 있다며 미안하다고, 다시 연락해달라고 하며 떠난다. 그 발걸음이 씩씩하다.

 

한참을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윽고 뒤로 돌아 발걸음을 옮긴다. 한숨을 쉬면 입김이 허공에서 차갑게 얼어붙는다.

 

그러고보면 살인 누명을 벗으려고 했는데. 그때 변호사가 필요하겠지. ……그리고, 그리고…

 

이 추위가 가시면, 어쩌면 봄이 왔을 즈음에는 그동안 저질러왔던 죄에 대해 자수하러 가게 될지도 모르지. 

 

그냥 그런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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