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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원래 똑똑해 머리는 나빠도

내 친구 (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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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2010년의 마지막 해가 저물었다.

 

해가 저물고 나면 남는 것은 어둠 뿐이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겠지만, 앞으로는 절대 오늘의 태양을 다시 볼 수 없겠지. 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는 소용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었지만, 가끔은 후회가 미래를 바꾸기도 한다는 것을 깨달은지 꽤 되었기 때문에 조금은 오늘의 일몰을 아쉬워했다.

 

순간이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으나, 괜히 2010년이 지나가는 것이 아쉬운 이유는 멀지 않은 미래에 헤어짐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자수를 하기로 했다. 아마 형량은 꽤 나올 것이다. 출소 후에도 렌 군의 집으로 돌아올 수 있겠지만, 떨어져 있는 시간은 꽤 길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일시적 이별 이후의 관계에 대해 그다지 확신이 없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이 멀어진다고, 출소 후에 진짜 범죄자가 되어 나온 친구를 가까이 둘 사람이 몇이나 될까. 렌 군을 믿지 못하나?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인간 불신이 기본 전제가 된 이상한 사람이었으니까. 그저 렌 군이 이후에 변한다 해도 상관없을 뿐이다. 그래도 괜찮았으니까.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니까. 배신당해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말이 아니다. 기꺼이 상처를 감수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배신당한다 해도 렌 군이 계속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이케부쿠로에 와서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하나도 변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쩐지 씁쓸한 마음으로 코타츠 위에 주전부리를 차렸다. 오늘은 새해 전야를 맞아 렌 군과 함께 연말을 느긋하게 즐기기로 했다. 일단은 생각을 갈무리하고 현재를 즐길 시간이다. 무엇보다, 앞에 렌 군이 같이 있으니까. 자정에 타종 소리를 들으면서 새해 인사를 해야지. 그러다보면 이 상념도 사라질 것이다.

 

평소보다 어쩐지 멍하니 있는 시간이 잦던 렌 군과 함께 키리모찌를 구워먹고, 귤을 까먹으며 홍백가합전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던가. 맥주 한 캔을 거의 다 비웠을 무렵, 자정을 기다리며 조용히 TV 화면 속의 커다란 종을 보던 렌 군이 말문을 열었다.

 

"마키오, 맥주 하나 더 줄까?"

"응?"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한 모금 정도 남은 맥주캔을 흔들어보였다. 나는, 작정했을 때가 아니면 보통 한 캔 이상으로 마시지 않았다. 취하는 것도 싫고, 절제하지 못하고 추태를 보이는 것도 싫었으니까. 그리고 렌 군도 그걸 잘 알고 있을 테다. 그래서 장난스럽게 한 마디를 했다.

 

"왜? 취했으면 좋겠어?"

"응."

 

그러나 돌아온 것은 의외의 대답이었다. 그러나 렌 군은 금방 그 대답을 부정했다. 그리고 곧 번복한 답을 다시 부정했다. 영문을 모르고 렌 군을 쳐다보고 있으려니, 렌 군은 말간 얼굴로 엉뚱한 말을 했다.

 

"모르겠네. 취했으면 좋겠는지, 취하지 않았으면 좋겠는지."

 

취해서 듣고 잊어버렸으면 좋겠는지, 아니면 분명하게 기억했으면 좋겠는지. 멍하니 중얼거리던 렌 군이 눈을 맞춰왔다. 그리고...

 

"좋아해."

 

좋아해, 마키오. 너를, 연애적 의미로.

 


 

댕—. 종소리가 울렸다. 옆집에서 새해를 맞이하는 환호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어느새 시간은 자정을 넘겨 2012년을 맞이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렌 군도 자정이 지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윽고 침묵이 내려앉고, 시계 초침 소리만이 들려왔다.

 

모든 것이 정지된 것 같았다. 몸을 돌려 시계를 보려다가, 그만 맥주를 엎고 말았다. 

 

"미, 미안."

"......괜찮아."

 

렌 군이 침착하게 휴지를 가져왔다. 그리고는 탁자에 엎어진 맥주를 닦아낸다. 어차피 한모금 정도 남은 거라, 얼마 엎지르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렌 군은 계속 탁자를 닦고 있었다. 계속. 고개를 숙인 채로.

 

자세히 보니 렌 군의 귀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이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리고 그 순간에 깨닫고 만다. 나, 렌 군을 좋아해.

 

왜 몰랐지? 왜 스스로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했지? 그야, 알고 있잖아. 겁이 났으니까. 자각하면 더 이상 친구로 남을 수 없게 될 테니까.

 

언제부터 좋아했지? 크리스마스 때부터? 서로의 쿠츠나기를 바꿨을 때부터? 이름이 적힌 앨범을 받았을 때부터? 언젠가 농담에 크게 웃었을 때부터? 아니면...... 어쩌면 그보다 훨씬 전부터?

 

네가, 그냥 네가 행복하면 좋겠어. 그 마음은 결국 사랑이라는 걸 왜 깨닫지 못했을까.

 

불안해보이는 얼굴이 고개를 든다. 그게 언젠가의 상처받은 표정과 꼭 겹쳐보여서.

나는 겁쟁이에 이기적이라서, 결국 항상 네가 절벽 위를 걷게 만드는구나.

 

괜히 침을 삼키고,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나오는 건 횡설수설 뿐이다. 그래서 입을 다물었다가, 한 마디만을 내뱉었을 뿐이다.

 

"나도......"

 

나도, 좋아해. 

 

네가 환하게 웃는다. 나는 그 순간 이 순간이 영원히 남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문득 잠에서 깨어나 눈을 뜨면 거실은 어두컴컴했다.

 

뜨끈뜨끈한 코타츠는 아직 열이 올라와있었고, 테이블 위를 더듬거려 휴대폰을 확인해보니 시간은 새벽 4시 5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알람이 울리기 딱 2분 전. 그러고보면 일출을 보기로 했지. 금세 말똥말똥해진 정신으로 어제의 기억을 더듬어본다. 저녁을 먹고 맥주 한 잔을 하면서 홍백가합전을 보고, 자정에 타종 소리를 들었다가, 새해의 첫 일출을 본다고 호기롭게 밤을 새자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키리모찌도 구워 안주로 삼고, 귤도 까먹으며 잠을 깨웠는데…

 

그러나 결국 자신도 렌 군도 잠이 든 모양이다. 불은 누가 껐더라. 아무튼 켠 채로 자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렌 군이 깨기 전에 울리려는 알람을 끄고, 잠시 아직 어두운 새벽 하늘을 보며 지나간 작년을 생각했다.

 

그리고 작년을 생각하면 결국 귀결되는 것은 렌 군이다. 잠든 렌 군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냥 알 수 없는 감정이 벅차올라 느릿하게 숨을 내쉬었다.

 

어제, 렌 군이 고백했어.

나를 좋아한다고 했어.

 

기쁨이 정도를 넘으면 머리가 멍해지는 모양이다. 평소에는 자신 있던 자제심도 그리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서 무심코 분명 들을 수 없을 렌 군에게 솔직한 말을 속삭이고 만다.

 

"헤어지기 싫어. 자수 같은 거 안할래. 영원히 렌 군이랑 있고 싶어..."

 

같이 있어줘. 함께 해줘. 매일 같은 해를 보고 같은 하늘을 봐줘. 떠나지 않을테니 떠나지 말아줘. 이왕이면 계속 나만 바라봐줘...

 

소원 같은 것을 속삭이다보면, 어느새 스스로가 웃겨서 웃음만이 나올 뿐이다.

 

그리고 이내 어두운 거실에 빛이 비치기 시작한다. 해가 뜨기 시작한다.

 

렌 군을 깨운다. 자꾸만 다시 잠들려고 하는 탓에 렌 군이 완전히 깨어난 건 정말 딱 해가 반쯤 지평선에 걸쳐져 있을 때였다. 렌 군, 운이 좋을지도. 차가운 새벽 바람을 맞으며 렌 군을 끌고나온 베란다에서, 어제 자정에 하고싶었던 말을 건넨다.

 

“새해 복 많이 받아, 렌 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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